14 Jun 재난을 주는 위로자
요즘 시가서 성경 읽기를 하면서, 많이 은혜를 받고, 또 내 인생을 많이 돌아보게 된다. 욥을 참으로 사랑하던 세 친구들, 욥의 환난 소식에 급히 달려와 함께 재를 뒤 집어 쓰고 침묵으로 그를 위로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누가 그들이 욥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보다, 욥에게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되었다. 욥기 16장 2절이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재난을 주는 위로자…’ 마치, 한문의 “모순(矛盾)”과 같은 말이 아닌가? 위로를 하러 온자들인데 도리어 재난을 주다니…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바로 그 친구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한 가지 틀 (Frame) 때문이다. 그 틀이 욥기 4장 7절에서 이렇게 소개 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인과응보 (因果應報), 인생이 경험하는 모든 환난은 죄의 결과라는 명제, 틀이 그들의 사고를 주장하니,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당연히 그의 죄의 결과요, 그렇기에 그들의 최대의 관심은 욥으로 하여금 속히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한 후, 욥이 당한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 없이 욥에게 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다. 자,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사단의 참소이다. 이들은 사단이 하나님께 나와 무고한 욥을 정죄하며 그를 곤란 중에 넣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할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이 세상에는 내가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겸손의 행위적 측면은 관계 속에서 온유와 인내, 오래 참음, 좋은 매너, 배려이라면, 내가 보는 것보다,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의 지적 측면이다. 이런 지적 측면에 대한 이해 없는 행위적 겸손은 많은 경우 가식과 외식으로 전락할 경우가 많이 있다. 욥의 친구들의 결정적 실수가 무엇인가?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끊임 없는 자기 주장에 위로를 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엘리후를 통하여 이런 말을 듣는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 32:9) 이 말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가? 내 생각이 고여 있을 때, 성숙을 향한 노력을 끊임 없이 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자가 당착적인 고지식한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 오히려 이웃에게 상처와 재난을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손가락질 하기 위하여 손을 올릴 때, 세 개의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엄지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는 말을 기억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로 하여 끊임 없이 자기를 비추어 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 가는 것이다. 이런 신앙 생활을 우리 모두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 정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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